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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08 오전 7:33:18 입력 뉴스 > 탐방

[탐방] 실패한 빗속의 야간산행



   

신의터재


오후 7시 신의터재에 도착하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야간이나 비가 오면 산행하지 않는다는 나의 백두대간 단독종주 두 가지 원칙을 한꺼번에 깨려는 날이었다. 우의를 꺼내 입는 등 10분 간 등산준비를 하여 들머리 오른쪽의 묘지 사이로 오르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어둠이 찾아들 시간은 아니었지만 비가 곧 퍼부을 듯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니 더욱 빨리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이어주는 띠지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어 마루금에 올라서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비는 오락가락했지만 왼편 선교리 마을의 불빛을 벗 삼아 그런대로 걸을 만했다. 이따금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도 싫지 않았다.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점점이 반짝이고 있는 마을 속으로 간간이 파고드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만드는 그림도 나를 심심치 않게 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저녁 예배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조차도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도시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진 소리들이 아니던가.

선교리 마을의 불빛이 사라진 다음부터는 적막강산(寂寞江山)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헤드램프를 켜기는 했지만 시계(視界)는 10m가 될까 말까인데다 비까지 내리니 나무에 매달린 띠지를 확인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걷기에 지치면 길가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돌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조금 쉴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걷고 쉬기를 되풀이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윤지미산


헤드램프에 비친 실비 사이로 오락가락하던 숱한 상념 가운데 생텍쥐페리의 소설 <야간비행(夜間飛行)>이 문득 앞을 가로막듯 떠올라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읽은 지가 하도 오래되어 20대였는지 30대였는지조차도 기억에 희미했다.

 

 그러니 머릿속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등장인물의 이름 같은 것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떠오르는 이야기의 줄거리도 명확하지 않았다. 생생하게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극히 간단한 줄거리였다.


남미 어느 곳의 우편 비행기 조종사가 야간 비행 중 폭풍우를 만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투(苦鬪)를 하다 폭풍우를 벗어나고 보니 바다 위였다.

 

그래서 다시 육지가 있을 듯한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악천후 속에 날아들어 불빛을 찾긴 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폭풍우 속에 갇힌 채 구름사이로 얼굴을 내민 별빛이었고, 그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전부였다.

산행 후 <야간비행>을 다시 읽고 찾아낸 이름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날 산행을 하는 동안 조종사 파비앵에 대한 많은 것을 생각했다. 그에게 목숨을 건 야간 비행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수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물론 그것은 소설 속의 조종사 파비앵을 향한 물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언서처럼 이 소설을 남기고 훗날 애기(愛機)와 함께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영원히 사라진 생텍쥐페리를 향한 것이었다. 아니 나 자신에 대한 자문(自問)이었는지도 모른다.

   

윤지미산 정상



밤을 무서워하지 않고 악천후를 겁내지 않은 조종사 파비앵 아니 생텍쥐페리가 자연 현상과 맞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의지는 무엇을 뜻하는가, 무엇이 그를 그렇게 정기항공우편 조종사의 임무에 충실하게 하였는가, 그가 보여준 행동에서 구하려한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느 평론가는 <야간비행>의 작품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다.

앙투안 장 바티스트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그는 항공기 조종사라는 ‘새로운 문명의 개척에 이바지하는 소명’을 다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의미, 곧 행동을 보다 구체화하고 그 행동을 통해 인간은 덧없는 육신을 초월하여 영원에의 참여’를 한 것이라고.

나는 산에 있는 동안만은 삶의 온갖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낀다. 특히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이나 걱정 따위는 아예 잊어버린다.

 

비록 빗방울이 굵지는 않았지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그 날도 그랬다. 그도 야간비행을 하면서 지금 내가 이 밤의 산행에서 즐기고 있는 해방감 때문에 죽음을 건 야간비행을 계속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실 산행하는 동안 나와 가족이나 내가 소속된 사회와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단독행일 때는 더욱 그렇다.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利器)가 나 자신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지만 깊은 산 속에서는 불통일 때가 많으니 그것마저 아예 꺼버리고 산행을 하면 마음은 더욱 편안해 진다.

 

이렇게 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끝없는 긴 능선과 수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봉우리들, 그리고 줄줄이 이어 나타나는 미지의 세계뿐이다.

   

화령정자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동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오직 스스로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안전대책을 강구해 두는 일도 없다.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며 가족들에게 코스를 세세하게 설명한 적이 없다.

 

당일행이면 어느 산으로 간다는 정도고, 2박 3일 이상의 긴 산행이라도 어느 산에 가는데 언제쯤 오겠다는 말이 전부다.

하지만 ‘적당히 하면 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산행에 나서지는 않는다. 그리고 산에 붙어 안전에 위험이 있다 싶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명확히 의식하면서 꼼꼼히 따져본 다음 행동한다.

 

지치면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쉰 다음 움직이고 자신을 잃지 않고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이것만이 솔로를 좋아하는 나의 유일한 안전대책이고, 또 단독행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이다.

그런데 이날 처음으로 나선 빗속 야간산행에서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의 산행이 되지 않았다. ‘가다가 안 되면 아무 곳에서나 비박하고 날이 샌 다음 계속하면 되겠지’라는 느슨한 의식에다 <야간비행>까지 오락가락했다.

 

산행을 시작한지 6시간이 지나도 화령재가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았다. 밤 1시가 이미 지나 있었다.


우의 속의 땀에 젖은 옷에서 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몸도 지쳐 있어 어쩔 수 없이 이슬비가 내리는 길가에 텐트를 치고 비박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무지개산 갈림길 이전으로 되돌아와 있지 않은가. 지난밤 6시간을 걸어 출발지점에서 겨우 1시간의 거리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아예 신의터재로 되돌아가 아침 8시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 걸었을까. 소나무 밑에 짙은 주황색 꽃들이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무슨 꽃인가 하고 자세히 보니 버섯이었다. 지난밤 야영한 밭가에서 오른쪽 산길로 들어서니 묘지 한기가 있었다. 지난밤 올라갈 때도 보았고 내려오면서도 본 묘지였다.

무지개산 갈림길 못 미쳐서 지난 8월 15일 북에서 남으로 백두대간 연속종주를 시작했다는 30대 초반의 대구 도반을 만났다.

 

다른 두 명과 같이 오다 혼자 먼저 왔다던 그가 떠나고 10여분 지나니 20대와 40대의 두 산 꾼이 다가왔다. 나도 어지간히 지쳐 있었지만 그들이 나보다 더 지친 듯 보여 그들의 사정은 이미 알고 있는 터라 눈인사만 하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윤지미산 정상에 오르니 몸도 마음도 지쳐 간식을 먹고 깔판을 깔고 누웠다. 파란 넓은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의 정령(精靈)이 나에게 다가와서 내 피곤한 육신을 포근하게 녹여주었다.

30여분 정신없이 자고 일어나니 짧은 바지를 입은 다리 여기저기에 벌레 물린 자국이 선명했다. 조금 눈을 붙인 뒤라 그런지 걷기가 한결 수월했다. 30분 정도 가파른 내리막을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용을 쓰며 내려가니 왼편으로 넓은 밭이 있는 길가에 도착했다. 간간이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어디를 보아도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의 띠지를 따라 백두대간 등산로에 접어들었으나 울창한 숲길이 아니었다. 햇볕을 그대로 받아야 하는 산길을 따라 다시 30분 내려가니 비포장도로와 만났다. 100여m 따라가니 길 왼편 언덕 틈새에서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물은 제법 차고 마실 만했다. 1.8ℓ짜리 패트병에 물을 가득 받아 거의 다 마시고 나니 갈증이 가시는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 멀리 도로가에 있는 공장 같은 건물을 바라보며 100여m 더 내려와 도로와 맞닿은 산으로 계속되는 백두대간 등산로에 접어들어 얼마를 걸었을까 포장도로 건너편에 밤새 그렇게도 만나기를 바랐던 팔각정이 눈에 들어왔다.

햇볕이 쨍쨍 내려 쬐는 9월 초의 오후 3시 50분이라면 등산을 계속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부산을 떠나기 전에 본 일기예보대로라면 다음날 비가 올 것이라고 한데다 실패한 비속의 야간산행으로 몸이 지쳤음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많이 산만해져 있어 산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산행메모 2003년 9월 3일(밤 흐리고 비) 낮 무궁화호로 김천, 버스로 상주로 가서 19:00 신의터재 도착, 10분간 산행준비 후 산행시작, 약 6시간 산행후 4일 01:00 야영, 06:45 신의터재로 돌아감, 08:00 다시 산행시작, 09:50 지난밤 야영지 통과, 11:30 무지개산 갈림길, 14:30 윤지미산, 15:00 밭옆 갈림길, 15:30 비포장도로와 만남, 13:50 화령재 등산완료, 상주에서 무궁화호로 김천 거쳐 부산까지. <제휴사= 경북제일신보, 이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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