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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8 오전 10:39:37 입력 뉴스 > 탐방

[탐방]황학산을 넘어 추풍령으로 ...
침낭이 축축하여 잠이 깨었다.



침낭이 축축하여 잠이 깨었다. 간밤에 이슬이 제법 많이 내린 듯 간이 텐트 안이 흠뻑 젖었고 주변의 풀잎 끝에도 이슬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5시가 이미 넘어 서둘러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5시 45분에 배낭을 지고 일어섰다. 젊은 도반은 이것저것 챙길 짐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늦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능선의 묘지에 올라서니 새빨간 해가 떠올랐다. 나는 기도하듯 해를 맞았다. 가슴 가득하게 차오르는 흥분과 이 대자연의 외경감(畏敬感).

삼성산 아랫자락까지 억새풀과 키 작은 잡목림 사이를 걸었더니 허리 아래가 이슬에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랫도리가 시원해 좋기는 했으나 바지 가랑이를 타고 내려온 물이 등산화 안으로 들어와 질퍽거려 걷기가 불편했다.

삼성산 정상을 넘자 아주머니 3명이 나물 캐러 올라오고 있었다. 1,030m봉을 막 도는데 길 가운데 앉아 삶은 감자를 먹고 있던 아주머니 4명이 불쑥 나타난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만약 이들이 맹수였다면 나를 무차별 공격했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그리고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곧 오십대의 부부를 만났다.

아래쪽 조그마한 산 위의 안테나가 보이고 그 너머로 고랭지 채소밭도 있었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도로와 마주쳤다. 왼편의 안테나를 바라보면서 길 한가운데에 배낭을 벗어 던지고 등산화와 젖은 양말을 벗어 물을 짜서 잠깐이나마 볕에 말렸다. 바지는 벗어 물기만 짜내고 바로 입었다.

우의를 꺼내 입었더라면 좋았을지 어떨지가 얼른 판단되지 않았다. 우의를 입었으면 땀으로 흠뻑 젖었을 터이니 말이다. 아무렇게나 앉아 간식을 꺼내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니 이렇게 좋은 것을”이라고 중얼거리면서 혼자 싱긋이 웃어보았다.

임도를 따라 100m정도 내려가니 등산로는 왼쪽 숲 속으로 이어졌다. 꾸불꾸불한 임도를 버리고 등산로를 따라 내려가니 아래쪽 빤히 내려다보이는 바람재까지는 경사가 심하고 제법 멀어 보였다. 거기다 큰 나무가 없는데다 햇볕까지 쨍쨍 쬐니 숨이 막힐 것 같았고 땀까지 줄줄 흘러내렸다.

바람재에서는 쉴만한 곳이 없었다. 잡초로 둘러싸인 헬리포트를 가로질러 형제봉으로 오르는 울창한 숲 속 길로 들어서니 살 것만 같았다. 배낭을 벗어 던지고 쉬고 있으니 뒤따라온 젊은 도반은 그대로 계속 올라갔다.

앞에 막아선 작은 봉우리를 향해 힘겹게 올라갈수록 길은 더욱 가팔랐다. 길이 험하든 어떻든 내가 넘어야할 산이니 이를 앙다물고 발자국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우뚝 솟은 참나무 사이로 고만고만한 소나무들이 섞여 있어 위안이 되었다. 더 오를 곳이 없다 싶으니 오른쪽으로 직지사로 빠지는 길이 나 있었다.

해발 1,030m인 형제봉이었다. 키 큰 참나무와 소나무가 자주 보이는 능선을 한 시간쯤 더 걸어 황악(학)산 정상인 1,111.4m의 비로봉에 올라섰다. 먼저 도착한 도반은 이슬에 젖은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말리고 있었다. 20여분을 같이 쉬다 “천천히 오라.”는 말을 남기고 10시에 내가 먼저 비로봉을 뒤로했다.

정상에서 아래로 조금 돌아 내려오니 백두대간은 곧 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졌다. 송진 냄새를 맡으니 기분은 상쾌한데 길은 걷기에 불편했다. 오래된 산길이라 바닥의 흙이 빗물에 쓸려 내려가 개울처럼 패어있고 굵은 돌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15분쯤 내려오니 길가의 숲에 붙어있던 하얀 나방들이 놀라 날아올랐다. 10여m 날다 지친 놈은 숲으로 사라지고 다른 놈들이 같은 행동을 되풀이했다. 백운봉까지 10여분 간 나방들과 함께 즐거운 산행을 하고 나니 얼마안가 오른쪽으로 백련암-직지사로 이어지는 백련암 삼거리가 나왔다.

   

황악산 표지


잠깐 배낭을 의자에 내려놓고 쉰 다음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운주봉으로 오르는데 나의 젊은 도반이 뒤쫓아 왔다. 운주봉에서부터 기복이 별로 없는 능선이 계속되다 궤방령까지의 하산길은 지루하기만 했다. 동쪽의 김천과 서쪽 영동을 잇는 977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궤방령에 도착한 것은 12시 10분.

옛날 걸어서 다니던 시절에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세 관문 중 서쪽 관문으로 주로 상도(商道) 구실을 했던 곳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박이룡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워 큰 공을 세운 곳이기도 했다.

김천 쪽으로 도로 따라 50m가량 내려가니 길가에 팔각 정자가 있었다. 누구나 지나가다 한 번 쯤은 차를 도로변에 세워두고 쉬고 싶도록 주변은 잘 가꾸어져 있었다. 그런데 한 쪽에 쓰레기가 수북이 쌓여 썩고 있는 것이 흠이었다. 식수는 아래쪽에 조금 떨어져 있는 과수원 옆에서 구해야했다. 드문드문 자동차가 다니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고 젖은 등산화와 양말, 상의까지 벗어 볕에 말리면서 점심을 먹고 잠시 눈을 붙였다.

젊은 도반은 그 동안의 긴 산행에 지쳤는지 궤방령에서 오후를 쉬면서 빨래나 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13시 30분 배낭을 챙겨 내가 먼저 일어났다. 햇볕이 따가워 들머리까지 50m정도를 걸었는데도 등이 촉촉이 젖어왔다.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를 왼편에 두고 반원을 그리는 낮은 능선 길은 더욱 덥게 느껴졌다. 가성산 정상으로 오르다 쉬고 있는데 젊은 도반이 앞서 나갔다. 능선에 오르니 도반이 쉬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내가 앞장섰다. 가성산에서 장군봉까지는 얼마 안 되는 거리였지만 하도 지루하게 걸어서인지 어딘지 모른 채 지나쳐 버렸다. 멀리 마지막으로 보이는 봉우리 눌의산으로 오르는데 산자락에 큰 참나무들이 하늘을 지를 듯이 뻗어 있어 보기에도 시원시원했다.

   

눌의산



눌의산 정상에 올라서니 도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표지석도 없는 그저 넓은 공터였다. 멀리 동쪽에 경부고속도로가 뻗어 있고 간간이 힘차게 달리는 기차도 보였다. ‘저놈을 타고가면 오늘 저녁에는 집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한 다음 좀 편안하게 자겠구나.’하고 생각만 해도 지금까지의 피로가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젊은 도반이 “지금 하산하면 무엇부터 하겠느냐?”고 물어왔다. “시원한 맥주나 한잔하면 그만이지.”라고 답했더니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싱긋이 웃으며 같이 배낭을 짊어지고 일어섰다.

젊은 도반이 뒤따라오는 데다 빨리 내려가 시원한 맥주 한 잔 할 생각에 쉴 시간을 아껴 가파른 산길을 계속 잰걸음으로 내려오니 백두대간 마루금은 과수원 옆으로 이어져 있었다. 과수원 옆 묘지에서 배낭을 벗어 던지고 왔던 길을 되돌아보니 눌의산이 까마득하게 멀리 쳐다보였다.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포도밭 사이 길을 벗어나서 추풍령 중심가에 들어가기 전 길가 조그마한 편의점 앞에 멈춰 섰다. 1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13시간 이상이 걸은 셈이었다. 땀을 닦을 생각은 아예 잊은 듯 우리는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가 우선 맥주 2병을 시켜 한 병씩 안주도 없이 들이켰다. 첫잔의 맛이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등산하면서 수많은 산 친구를 만났다. 그들 가운데는 스스로 프로라고 하는 등산의 달인(達人)이 있는가 하면 등산화를 처음 신어보는 새내기도 적지 않았다. 만난 지 30여 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등산 도반이 있는가 하면 한때 같이 산에 어울려 다니다가 언제 왜 헤어져 잊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산 꾼도 많다.
꼭 등산의 달인이라고 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아마추어여서 쉬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경우는 힘든 산행을 같이 한 사람일수록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등산의 달인이라는 이들에게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번 하겠다고 하면 해내는 외곬의 근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런 근성 때문에 등산 도사들은 스스로 자기 원칙에 빠져 융통성이 없다는 비난도 자주 듣게 된다. 또 산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이들은 지역 산악단체나 전문 산악회에서 대단히 존경받을 법한데도 꼭 그렇지 않다.

스스로 등산의 달인 또는 프로라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산은 나의 것과 달랐고 등산에 대한 생각도 같을 수가 없었다. 우선 나는 20대에 바위를 접할 기회가 없었고 나이 들면서 약간의 고소 공포증이 생겨 책으로만 록클라이밍을 했을 뿐 바위를 본격적으로 오른 적이 없다.

   

추풍령표지



그래서 우선 내가 오르는 산은 험악한 절벽의 바위 코스가 아니라 그냥 그런 산이다. 그리고 등산의 즐거움도 피를 말리는 위험의 극복에서가 아니라, 건강에 좋을 만큼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내리며 나를 되돌아보는 재미가 모두다. 그렇다면 2박3일 48시간 동안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행을 같이했고 지리산 치밭목 산장에 가면 만날 수 있다는 이 젊은 도반은 나에게 어떤 산악인으로 기억될까.

부산까지 와야 하는 나는 서둘러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고 종주를 계속할 젊은 도반은 등산 들머리 부근의 힐튼장 여관으로 갔다.

◇산행메모 6월 17일(맑음) 05:45 우두령 출발, 07:30 삼성산(도중에 20분 휴식), 08:20 바람재(10분 휴식), 09:10 형제봉, 09:38 황학산(20분 휴식), 12:10 궤방령(팔각정에서 1시간20분 점심겸 휴식), 13:30 궤방령 출발, 16:05 가성산, 17:50 눌의산, 19:05 추풍령, 시외버스로 김천, 무궁화호로 부산.<경북제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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