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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5 오전 11:33:59 입력 뉴스 > 영천

고깔을 쓴다(182)
한관식 작가



현관 센스 등이 켜졌다. 감지되었다는 것은 곧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익숙한 인기척에만 작동하는 충등(忠燈)처럼 느껴졌다. 센스 등 아래 현관 벽에, 조용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형언 할 수 없는 먹먹함이 목젖으로 몰려들었다. 아내의 부재중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저 화장실과 안방과 서재와 주방과 거실에서 불쑥 튀어나와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그런 아내는 지금 보이지 않았다. 저 베란다와 소파와 거실 바닥과 주방의자에서 정물처럼 앉아있거나 누워있어도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여, 나는 일상에 젖어들 것이다. 미물인 센스 등마저 쉽게 알아보고 불 밝혀주는 이 상황에서 가까이 없는 아내가 원망스러웠다. 첫날밤 아내와 손을 맞잡으면서 끝까지 지켜준다고 한, 서로의 약속이 이런 결말을 예견하긴 했을까. 삼년 전 포항 지진으로 몇 차례의 진동이 진정한 공포를 알게 했다. 아파트 전체를 시시각각으로 덮쳐오는 외마디 전율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서, 아내와 넋이 나간 채 식탁 밑으로 몸을 숨겼다. 밖으로 뛰쳐나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식탁 밑에서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수 킬로 떨어진 포항지진 강도가 5.5에 따른 여진이, 아파트 안에서 수레바퀴가 퉁탕 거리며 지나가는 느낌으로 전달받는 데는 말문이 턱 막혔다. 시도 때도 없는 일본지진의 강도가 9.0이라는 기사를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선진국 반열에 일본을 올려놓은 것은 아닌지 그 <깡>이 사뭇 궁금해졌다.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나약하기 짝이 없지만 곧 강해질 채비를 서두르는 것도 인간일 것이다. 전열을 가다듬은 아내가 나약하고 초라한 남편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더 강해져야겠다는 결의가 두 눈 가득 빛나고 있었다. 식탁 밑에서 빠져나온 아내는 분연히 일어섰다.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앞장 선 내 길을 따라올 수 있지요? 선봉으로 나서서 적군의 불화살도 두려워하지 않는 장수처럼 아내는 크고 우람하게 보였다. 식탁 밑에서 빠져나온 후줄근한 내가, 아내의 등을 보며 계단으로 내려와서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엘리베이터는 절대 탈 생각을 마세요. 내려오는 도중에 주의사항도 아내는 챙겨주었다.
센스 등에서 벗어나 거실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욕실에서 미처 잠그지 않은 수돗물 소리가 잘게 들려왔다. 그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내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죽음처럼 적막했고 슬픔처럼 눈가가 젖어있었다. 언제나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다고 믿었던 아내의 존재가, 수목장으로 묻은 소나무 뿌리 어디쯤에 자양분으로 생명을 이어 나갈 것이다. 목선이 예쁘고 쇄골이 보이면서 팔다리가 긴 내 아내여. 선두에 서서 나를 지휘하기도 하고, 떠받쳐주기도 했던 매력적인 입꼬리를 가진 미소의 아내여. 허지만 지금은 이별할 때다. 당신의 모습을 가장 많이 담을 수 있는 가슴을 유지하며, 어느 세상 어느 곳에서 처음처럼 막걸리를 앞에 두고 합석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가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까. 당신의 냄새와 당신의 체온과 당신의 살결이 분명하게 이정표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지켜준다는 약속 파토내지 않고 내가 먼저 다가갈 것이다. 귓가에 맴돌면서 작은 방울로 떨어지는 수돗물 소리를 누가 좀 꺼줄래? 손가락 한마디도 움직이기 싫어서 이렇게 죽은 듯이 내 몸을 접었다. 문득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도시의 야경이 왜 이리도 아득하게 다가오는지 알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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